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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지역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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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진남관 [국보 제304호]

관리자 2022년 10월 11일 17:14 조회 166

여수 진남관 [국보 제304호] - 이미지1


               ■ 시  대 : 1599년(조선 선조 32)
               ■ 소재지 : 여수시 동문로 11(군자동)
               ■ 내  용 : 여수시 동문로 11에 위치한 국보 제304호 여수 진남관은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전라좌수영성의 유일한 건축물이다.
                            [역사적 환경]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인 선조 32년(1599) 이충무공의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세운 75칸의 대규모 객사이다.
                            남쪽을 진무한다는 의미에서 진남관이라고 하였는데, 『난중일기』에는 진해루에서 공무를 보았다 하고, 이후 현종 5년(1664) 절도사 이도빈에 의해 크고 작은
                            수리를 거쳤으나 숙종 42년(1716) 절도사 이여옥 때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숙종 44년(1718) 이제면수사가 다시 중창한 것이 오늘날의 진남관이다.

                            그 뒤 헌종 10년(1844)에 다시 동서 7칸을 보수한데 이어 고종 35년(1889)에 초대 군수 김홍목과 2대 군수 최정익이 거듭 중수하였으며 일본 강점기에 들어와서는
                            김한영, 김한수 형제가 전관을 중수하였다.

                            선조 32년(1599)에 완성된 후 고종 21년(1895) 영(營)이 혁파될 때까지 전라좌수영의 객사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부근에 여러 관아건물과 함께 배치되어 있었으나
                            현재 유일하게 옛 건물로 남아 있다. 호좌수영의 성곽은 훼손이 심하여 당초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현존하는 부속건물은 진남관 어칸을 종단하는
                            남북축을 따라 앞마당 끝에 평삼문이 있고 경사지의 돌계단을 내려오면 망해루가 세워져 있다. 내삼문과 망해루는 영(營이) 혁파되면서 없어진 건물들로 근래에
                            다시 건립되었다.

                            이시언 통제사가 진남관을 지은 목적은 여수가 영호남의 인후로서 왜침의 방비를 소홀하게 할 수 있는 해상방위의 요충지임을 강조하고 이충무공의 유덕을 거울삼아
                            더욱 방위를 튼튼히 하라는 뜻에서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크게 쓰였다는 기록은 별로 없고 다만 역대 임금의 궐패를 모셔놓고 매월 삭망에 관장이 제를
                            올렸고 국가의 경사나 애사에 봉도식을 거행하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그러다가 한일합병 뒤인 융희 4년(1910) 여수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쓰인 적이 있으며 해방 후 1946년 여수 중학교와 여수 야간상업학교 그리고 1947년에는
                            봉산초등학교 교사로 쓰인 적이 있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53년 진남관 보수 공사 도중 1718년 이제면 수사가 쓴 현판이 발견되었다.

                            전라좌수영의 객사인 진남관에 대한 기록은 『호좌수영지』(1847, 『호남 여수읍지』(1871), 「진남관 중건 상량문」(1718), 「진남관 중건지」(1718),
                            「진남관 중수기」(1899), 「중수 감동록」(1899), 『여수지』(1902)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좌수영지』는 전라좌수영의 영성과 병력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자료를 통해 성종 10년(1479)에 영이 창설되고 고종 32년(1895) 혁파될 때까지
                            전라좌수영의 성곽과 관아건축의 조영 및 개·보수에 대한 연혁이 확인된다. 진남관의 규모에 대해 ‘공청(公廳) 진남관은 70칸이니 강희 3년 갑진(1664)에는
                            절도사 이도빈이 다시 짓고 판서 유혁연이 서액하였는데 중문은 3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진남관의 보수 과정에서 확인된 「진남관 중건 상량문」(1718),
                            「진남관 중건지」(1718), 「진남관 중수기」(1899), 「중수 감동록」(1899) 등에서 진남관의 중건 및 보수에 관한 기록이 확인된다.

                            [발굴조사 현황]
                            진남관은 정비 및 해체·보수 사업 등이 계획되면서 몇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이에 대한 현황은 다음과 같다.
                            2008년 진남관 주변 공영 주차장 시설 공사에 앞서 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에서 시굴 및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전라좌수영성 내부 남서쪽
                            가장자리 부분에 해당하는데, 1847년 작성된 『호좌수영지』 영성도를 참고하면 紙倉이 위치하고 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조사 결과, 건물지 3기, 건물지가
                            폐기된 이후의 구가 3기, 수혈 9기 등이 조사되었다. 서쪽 가장자리 부분에서 당시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패각층이 확인되었다.
                            건물지의 경우 현재 진남관의 방향과 『호좌수영지』 영성도에 나타난 방향을 참고하였을 때 1호와 3호 건물지가 전라좌수영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되며, 2호
                            건물지를 비롯한 수혈과 구상유구 등은 출토유물들이 교란되어 출토된 점을 고려하였을 때 조선 후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상평통보를 비롯하여 분청사기·백자 등의 자기류와 도기류, 기와류, 패각과 수골 등 조선 전기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2016년에는 여수시에서 추진 중인 진남관 해체·보수 사업의 일환으로 진남관 주변 가설 덧집 및 작업장 설치 공사에 앞서 동서종합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진남관 전면 동쪽 부분에서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동쪽 측면에서 건물지 및 이와 관련된 기단 및 배수로, 보도시설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대부분 상부 교란층에서 자기편과 기와편이 확인되었다. 자기편은 16~19세기에 제작된 백자편이 주를 이루며, 기와편은 무문·창해파문·집선문 등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후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019년에는 진남관 보수·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나라문화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비롯하여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1차 발굴조사 결과, 진남관은 시기적인 평면형태의 변화가 있었으며, 동·서 익헌의 벽체시설과 아궁이가 확인되었고, 3차에 걸친 기단 축조양상 변화가
                            확인되었다.
                            또한 문헌기록에 남아있는 진남관 초축 이전 건물지에 대한 양상도 확인되었다. 2차 발굴조사 결과, 2가지 형식의 적심축조 양상과 5개소의 초석 이동현황이
                            확인되었다.

                            먼저 건물지 내부 퇴적 양상을 살펴보면 북동·북서·중앙과 남동·남서쪽에 차이를 보인다. 정청과 벽체시설이 위치한 중앙 및 북쪽의 경우 화강암대 풍화암반층을
                            이용하여 다짐처리 하였으며, 내부 퇴적토를 굴광해 적심을 조성하였다. 다짐층을 제거하자 풍화암반층이 확인되고 이 풍화암반층 상에서 진해루로 추정되는
                            기단열 및 적심 굴광이 확인되었다.
                            남동·남서쪽은 동-서 길이 약 11m, 남-북 길이 약 7m의 기와 폐기층이 퇴적되어 있다. 기와+석제+목탄이 함께 폐기 퇴적된 것으로 판단되며, 동·서쪽으로
                            대칭구조를 이룬다. 명황갈색사질토층을 ‘L’자로 절개한 흔적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중앙의 명황갈색사질토층이 조성된 후 덧대어 확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건물지 내부 퇴적양상을 통해 볼 때 진남관의 평면형태는 2차례에 걸쳐 변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1차 건물지는 평면 ‘凸’자 형으로 진해루(추정)가 폐기된 후 북쪽 기단 전면에 기와+석재+적갈색사질점토를 폐기시켜 면을 정지하였으며, 정청의 동·서 측면에
                            벽체시설을 붙여 방을 구성한 후 남쪽으로 1칸, 측면으로 2칸을 내어 마루를 구성하였다.
                            2차 건물지는 1차 건물지의 전면에 기와+석재+목탄을 폐기한 후 건물지 내부를 확장해 장방형의 평면형태를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기와 폐기층 내부에
                            동바리초석들이 남-북 방향으로 열을 지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서·남동·남서쪽은 벽체시설에 붙여 마루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단은 3차례의 형태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차 기단은 진남관 건립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풍화암반층을 ‘L’자로 굴광한 후 치석된 할석을 이용해
                            평적식으로 축조하였다. 2차 건물지 확장 과정에서 폐기되어 북서쪽 기단 일부만 확인된다.
                            2차 기단은 1차 기단의 전면과 상부에 암갈색사질점토를 채워 성토한 후 성토층을 굴광하고 조성하였다. 1차 기단에서 북쪽으로 약 50㎝ 이격되어 있는데,
                            2차 건물지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기단이 확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2차 기단은 할석을 이용해 평적식으로 축조한 후 1차 기단과 2차 기단 사이에
                            갈색사질점토를 채워 보강하였다. 기단의 상부는 3차 기단 조성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판단된다.
                            3차 기단은 현재 건물지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2차 기단 성토층을 굴광한 후 조성되었다. 지형의 고저차에 의해 북쪽으로 갈수록 기단석의 높이가 낮아지는
                            천적기단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남쪽 기단은 길이 5,883㎝, 높이 110㎝이며, 동·서쪽 기단은 길이 1,850㎝, 높이 32~110㎝로 북쪽으로 갈수록 기단의
                            높이가 낮아진다. 남·동·서쪽 기단은 장대석을 갑석으로 올리고 하부에 다듬돌을 1~3단으로 바른층쌓기한 결구식 기단이다. 북쪽 기단은 2차 기단의 최하부를
                            지대석으로 재사용하였다. 길이 5,885㎝, 높이 30㎝로 길이 100㎝ 내외의 장대석을 1단으로 쌓아 조성하였으며, 기단 내 성토층과 기단석 사이를 잡석 채움과
                            회다짐을 처리해 보강하였다.

                            적심축조 양상은 2가지 형식으로 확인되었다. A형식은 적심석을 2단으로 조성한 것으로 적심공 바닥면에 기초석(할석 또는 판석)을 넣은 후 초석과 적심 사이를
                            보강하기 위한 적심석을 시설하였으며, 건물지 북쪽 중앙에서 대부분 확인된다. 축조순서는 적심공 굴광→1단석(기초석)→내부 충진토→2단석(초석-적심 보강)의
                            순으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주로 건물지의 북쪽 외곽열에서 확인되는데, 건물지 북동·북서쪽 모서리와 북쪽 중앙에 위치한다. 판석으로 기초된 14번의 경우
                            초석을 제거하자 지하수가 유입되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지하수 유입으로 인해 기단내부 지내력이 약화된 북쪽 중앙은 적심공 바닥면에 기초석을 충전해 내구성을
                            보완한 것으로 판단된다.
                            B형식은 적심석을 1단으로 조성한 것으로 기초석을 시설하지 않고, 초석과 적심 사이를 보강하는 적심석만 시설한 것이다. 축조순서는 적심공 굴광→내부 충진토→
                            1단석(초석-적심 보강)의 순으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적심굴강 내부 조사를 통해 확인된 진남관의 기단내부 성토층 조성은 4가지 방법으로 확인된다. 첫째, 남동·남서 모서리는 2차 건물지 조성과정에서 퇴적된 기와·석재
                            폐기층으로 기단내부를 조성하였다. 둘째, 북동쪽은 진남관 이전 건물지 폐기 후 퇴적된 진갈색사질점토+목탄+기와층으로 기단내부를 조성하였다. 셋째, 북쪽은
                            풍화암반부스러기가 포함된 황갈색사질점토층을 성토하여 기단내부를 조성하였다. 넷째, 서쪽과 중앙부는 30㎝ 이상의 할석을 채워넣고 상면에 풍화암반부스러기가
                            포함된 적갈색사질토를 깔아 기단내부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기단내부 성토층 조성방식의 차이에 따라 B형식은 적심 바닥 정지면의 양상에 차이를 보인다.
                            초석이동은 5개소에서 확인되는데, 이동방향은 남·동·서쪽으로 2차례의 적심 사용 흔적이 확인되거나 적심과 초석의 중심이 이격해 있어 초석이 이동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진남관 서쪽에 위치한 3호 초석은 적심 내부 충진토와 적심 내부를 1/2 제거하자 바닥면에서 원형의 적심석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북쪽에 위치한 8호와
                            18호는 각각 동·서 익헌의 벽체를 구성하는 초석이다. 8호는 초석의 하부에서 동쪽으로 이격해 적심이 확인되었으며, 18호는 적심 내부를 1/2 제거하자 바닥면에서
                            북서쪽으로 치우쳐 적심굴광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남쪽에 위치한 29호는 1차 건물지의 남동쪽 모서리에 위치한다. 적심 굴광에서 남서쪽으로 초석이 치우쳐 있었으며,
                            초석을 제거하자 하부에서 원형의 적심석이 노출되었고 이 적심석을 제거하자 적심 굴광에 맞춰 30㎝ 이상의 할석을 사용한 적심석이 확인되었다.

                            진남관에 대한 문헌기록 및 발굴조사결과를 통해 확인된 진남관의 변천양상을 정리해보면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진해루로 추정되는 건물이 폐기된 후
                            ‘凸’자 형의 평면형태로 진남관이 축조되었으며, 2단계는 현재의 평면형태인 장방형으로 중건되었다. 3단계는 일제강점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리·보수가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이다.

                            출토유물은 기와류와 자기류 등이 확인되었다.
                            기와류는 막새와 평기와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이 평기와이며, 막새기와는 소량 출토되었고, 망새 1점이 출토되었다. 자기류는 주로 분청자와 백자가 확인되었는데,
                            1단계 건물지 내부 성토층에서 분청이 다수를 차지하고 2단계 건물지 내부 성토층 및 기와 폐기층에서는 백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백자와 함께 공반되는 유물로
                            백자연봉이 다수 수습되었다. 연봉은 지붕의 처마 끝에서 기와의 고정 못에 꽂혀 장식성을 배가시키는 건축부재로서, 고정 못은 처마 끝에 위치하여 수막새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고정 못을 사용하면 기와의 구성은 견고해지지만 상면으로 못의 일부가 튀어나와 미관을 해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에 일부
                            위계가 높은 건물에는 튀어나온 못의 일부에 도자기로 제작된 연봉을 끼워 장식성을 높이기도 하였다.
                            연봉이 확인된 건물은 개심사 대웅전(보물 제143호), 은혜사 영산전, 송림사 대웅전, 신계사 대웅전, 전등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국보 제290호), 범어사 대웅전,
                            법주사 천와운 등이며, 대부분의 건물은 금당이거나 금당에 버금가는 건물이다. 진남관에서는 2차 건물지의 기와폐기층을 중심으로 연봉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초축 당시의 전라좌수영 내에서도 진남관이 상당한 위계에 속하는 건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여수 진남관은 2014년 제6차 건축문화재분과 위원회에서 해체·보수하기로 결정되어 보수 중에 있다.

                            ※ 참고자료
                              1) 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9, 『우리지역 문화재도록』.
                              2) 조선대학교박물관, 2000, 『여수시의 문화유적』.
                              3) 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 2011, 『여수 진남관 주변 공영주차장부지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4) 동서종합문화재연구원, 2016, 『여수 진남관 보수정비사업 부지 내 문화재 발굴(시굴)조사 약보고서』.
                              5) 나라문화연구원, 2021, 『여수 진남관』.
                              6) 문화재청 GIS통합인트라넷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