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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지역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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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석보 [사적 제523호]

관리자 2022년 10월 11일 17:06 조회 98

여수 석보 [사적 제523호] - 이미지1


               ■ 시  대 : 조선시대
               ■ 소재지 : 여수시 여천동 868
               ■ 내  용 : ‘여수 석보’는 조선시대(15세기 중반) 널리 활용되었던 산지(山地)나 평산(平山)지역이 아닌 평지(平地)에 축조된 방형(方形)의 성곽 시설이다.
                            여수 석보는 처음에는 군사적인 방어 위주의 석보(石堡·돌로 쌓은 성)에서 출발하여 점차 관청용 물자비축의 창고(倉庫)와 장시(場市·시장) 기능으로 활용되는
                            등 다양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주목되는 유적이다.

                            [역사적 환경]
                            여수 석보란 이름이 처음 사용된 것은 1457년(세조 3) 정월의 『세조실록』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도순찰사 박강과 부사 구치관
                            등이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여러 진과 여러 포를 순심하고, 당연히 행할 사건을 아뢰어 하나하나씩 조목조목 열기하였다. … 전라도 순천의 돌산포에는
                            동쪽에는 내례석보가 있고, 서쪽에는 여수석보(呂水石堡)가 있어 바다와의 상거가 동떨어지게 멀므로 방어가 긴요하지 않으니, 지금 돌산포를 혁파하고 그 선군을
                            내례와 여도에 분속시키게 하소서. …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조실록』 권6, 3년 1월 16일 신사) 당시 진관체제와 맞물려 현지실사 작업을 통해 수군진을
                            재정비하고자 한 것으로 내례석보와 함께 여수석보가 언급되고 있다. 여수의 한자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지만, 내용을 통해 呂水石堡와 麗水石堡는 동일한 석보를
                            말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설치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여수석보는 1457년(세조 3) 정월 이전부터 수군진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작은 규모의
                            석축 성곽을 갖추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수군진으로서의 석보의 기능변화와 폐지는 1555년(명종 10) 5월 달량진왜변을 비롯한 1522년(중종 17) 6월 추자도 침입 및 삼포왜란 등 계속된 왜변으로 인하여
                            전라도 수군진이 전라 우수영의 임치도진관과 가리포진관, 전라 좌수영의 방답진관으로 새롭게 개편되는데(『중종실록』 권44, 17년 5월 임자) 이러한 수군진의
                            재정비에 맞추어 석보의 기능이 폐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수 석보가 창고시설로만 이용되기 시작한 것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로 1592년 4월 18일의 기록 가운데, ‘… 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데려오던 兵房이 석보창에 머무른 채 군사를 거느리고 오지 않으므로 잡아다 가뒀다’라 하여 석보창이란 명칭이 나온다. 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이 관내 고을에
                            군사를 동원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순천의 군사를 데려오던 병방이 곧장 좌수영으로 달려오지 않고 석보창에 머물렀다 하면서 석보창이 처음 등장한다. 이후
                            『승평지』의 창고 조항에서 다시 등장한다. ‘석보창(來註) 즉 여수 석보이다. 평시에 창고를 두어 여수, 삼일포, 소라포 등 세 리의 환곡을 여기에 거두어
                            간직하였으나, 지금은 폐지하였다. (新增) 지금은 다시 창고로 사용한다.’ 이수광이 읍지를 편찬하던 당시에는 이미 폐지된 상태였지만, 그전에는 여수, 삼일포,
                            소라포 3개 리의 환곡을 거둬 보관하는 창고가 석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미 환상곡을 여기에서 수납하던 창고로 기능이 변화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여수 석보에는 장시가 들어서는데, 『신증승평지』 장시조에 ‘지난해 잠시 설치하였다가 폐지하였다. (신증) 매월 5일과 10일에 장이 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석보의 장시는 지역 내에서 매우 이른 시기부터 개설된 편이다. 순천지역에서 처음 열린 것으로 기록된 3개 장시 중의 하나였다.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1729년 이전에 다시 개설되었으며, 19세기 말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석보의 규모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순천도호부 관방조에는 ‘여수석보:둘레 1,479척, 높이 10척이며 안에 우물 3개가 있다. 절도사(전라좌수영 절도사)가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고 밝히고 있는 이래 모든 지리지에서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당시의 용척인 포백척(46.73㎝)으로 환산해보면 둘레 691m,
                            높이 4.7m로 복원되는데 현재 외성벽을 기준으로 한 석보의 규모가 약 703m임에 비추어 거의 차이가 없다.

                            [발굴조사 성과]
                            1992년 수립된 석창성지 복원 기본계획의 일환으로 3차례(3차 발굴조사는 1지구와 2지구로 구분하여 실시하였다)에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1차 발굴조사는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순천대학교 박물관, 전남대학교 박물관이 연합하여 2001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건물지는 성내 가장 높은 곳에서 3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나 유구가 심하게 훼손되어 정확한 규모와 기능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주요 시설이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는 복판의 건물은 모두 시대가 조선조 후기로 내려오는 것이고,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초기의 건물들은 중복으로 건축되면서 사라졌으리라 판단된다.

                            1차 발굴조사에서는 남문지와 동문지만 확인되었다. 남문지는 남쪽 성곽 중심에서 약간 동쪽에 치우쳐 시설되었다. 동문지는 현재 진입로로 이용되기 때문에
                            많이 파손되어 성문의 남쪽 부분만 유구가 남아있고 북쪽 부분의 유구는 대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남쪽 육축의 대략이 남아있고 남쪽 문지도리돌, 2개의 적심석
                            등이 확인되었다.

                            해자는 양쪽 벽에 석재를 수직으로 쌓아 올린 석축 해자이다. 특히 동문지 앞의 해자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으므로 별도의 다리 시설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출토유물은 기와류와 자기류, 백자류가 출토되었다.

                            2차 발굴조사는 2007년 남도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서벽과 서문지, 수구와 배수로, 해자가 확인되었고 성 내부에서는 건물지 5동과 우물 1개소,
                            연못지 1개소, 담장 1곳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훼손된 구간이 많았으나 서쪽 전 구간에 걸쳐 일정한 형태로 노출되었다. 성곽 축조 방법은 지정을 다지고 위에 지대석을 넓게 구성한 다음 1매의 큰
                            석재를 면을 세워 쌓은 후에 위에 그보다 작은 석재를 올려 성벽을 구성하였다. 내면에는 일정한 너비만큼 할석을 깔고 그 위에 할석을 채워 넣고 흙으로 쌓은
                            편축식이다.
                            또한 서벽에서 구례시면(求禮始面)이란 명문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통해 석창성 축조 시 인근 주민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남지방의 성벽에서 축성과
                            관련된 명문이 확인된 예는 영광 법성진성, 진도 읍성, 흥양 읍성 등이 있다. 석창성은 수군진보이므로 수군으로 편재된 구례 군현민들이 동원되어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수구와 배수로는 성의 중앙에서 서쪽에 치우친 연못에서 시작되어 성벽을 통과한 다음 성 밖 해자에 다다르는 유구의 전체 형태가 확인되었다. 배수로는 30㎝
                            내외로 바닥에 판석을 깔고 그 위에 할석을 모를 세워 쌓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성벽 내부에서는 외부에서 확인된 배수로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위에
                            개석을 덮어 암거형태로 설치하였으며, 출수구는 기단석을 좌우로 이격시켜 그 위에 성벽 부재를 올리는 구조를 취하였다.

                            서문지는 성벽 남단에서 조사되었다. 전체 윤곽을 조사하지는 못했으나, 성벽의 축조 형태가 조잡하고 하부 기단이 허술하며 내부에서 외벽과 같은 형태의
                            벽체가 직각으로 꺾여 구성된 점 등으로 미루어 폐쇄된 문지로 판단된다. 성문이 폐쇄되는 시점은 중종 17년 수군진의 재편과 정비 과정에서 기존의 방어성
                            기능에서 환상곡을 수납하던 창고의 기능으로 전환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는 총 5동이 확인되었으나 유구의 유실과 파괴로 인해 규모를 알 수 있는 것은 2동뿐이 조사되었다. 또한 모든 건물에서 출토된 유물이 막새류가 없는
                            평기와만 확인되고 있으며, 아궁이와 같은 내부시설이 없는 것을 감안하면 주요 관청 건물이나 주거시설보다는 창고와 같은 부속 건물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자는 서쪽 지역이 가장 낮은 곳으로 뻘층의 깊이도 가장 깊게 조사되었다. 성 내부의 배수는 서쪽에 놓인 연못에서 1차 집수가 이루어진 다음 배수로를 통해
                            해자로 연결되는 형태로 나타났다.

                            출토유물은 주로 청해파문이 시문된 18~19세기 전후의 기와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자기류는 청자, 분청자, 백자가 발견되지만 대부분 17~18세기에
                            제작된 백자임을 감안할 때, 석창성이 가장 활발하게 이용되었던 시기는 조선 후기로 판단된다.

                            3차 발굴조사는 1지구와 2지구로 구분하여 실시하였는데 2014년 마한문화연구원에서 1지구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성벽과 해자의 전체 현황과
                            축조 방법을 파악하였고, 성 내부에서는 건물지 3동, 수혈 44기, 소성유구 20기, 미상유구 1기를 조사하였으며, 삼국시대 주거지의 윤곽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

                            동벽 남쪽과 남벽의 축조 순서는 우선 잡석을 깔고, 넓적한 지대석을 놓은 후 약 30㎝ 정도 들여서 성돌을 올렸다. 내탁부는 약 400㎝ 폭으로 비교적 큰 할석들을
                            채우고 그 뒤편으로는 흙을 쌓아 축조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남벽 성돌에서 화순(和順), 삼과상(三果上)이라는 각자가 확인되어 2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구례시면(求禮始面)이라는 각자와 함께 인근 주민들을 동원하여
                            축성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해자는 체성부가 축성된 후 부분적인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평면 형태에서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온 것으로 파악되었다. 특히 남문지 앞 해자에서는 적교시설이
                            확인되었는데, 목주도 남아있었다. 적교시설은 남문지에서 약간 비켜선 곳에 설치하였는데 고정식의 상판 구조이며, 주공 내부에서 확인된 유물을 통해 석보가
                            창고기능으로 전환된 시점에 설치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건물지, 수혈, 소성유구도 확인되었는데, 건물지 2동을 제외하고는 석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유구들로 확인되었다. 건물지 1동은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것이고, 수혈과 소성유구 대부분은 석보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추정된다. 또한 남동쪽 평지에서는 삼국시대 주거지 윤곽이 26기 이상
                            확인되었다.

                            2지구에 대해서는 대한문화재연구원에서 2014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성벽 기초부 및 성벽 시설물, 축성법 등이 확인되었으며, 해자의 대체적인
                            규모의 구조, 체성 내부의 유구 잔존현황 등이 파악되었다.

                            체성과 관련하여 성벽 기저부의 적심 시설과 지대석 면석으로 구분되는 체성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성곽들은
                            모서리에 각을 두어 마감한 것과는 달리 말각으로 곡면 처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벽 축조 방법 또한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채움 마감한
                            내탁식으로 축조한 사실 또한 밝혀졌다. 이는 웅천읍성, 밀양읍성, 언양읍성 등과 같이 세종 20년(1438)에 시행된 ‘축성신도(築城新圖)’ 반포 이후 바뀐 축성법의
                            사례로 판단된다.

                            해자는 체성을 따라 방형으로 조성되었으며, 목재를 이용하여 결구하거나 보강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체성 내부에서는 건물지와 매납 시설, 소성유구, 수혈, 주거지 등이 확인되었으나 석보가 기능을 상실한 이후 경작지로 활용되면서 원지형이 상당 부분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로는 자기류와 도기류,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시대별로는 조선 중기 이후의 자기류와 도기류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석보가 축성되기 이전 단계에 해당하는
                            삼국~고려시대의 유물과 석보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 참고자료
                              1) 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9, 『우리지역 문화재도록』.
                              2) 명지대학교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순천대학교박물관, 전남대학교박물관, 2003, 『석창성지 발굴조사 보고서』.
                              3) 마한문화연구원, 2008, 『여수 석창성지 –2차 발굴조사-』.
                              4) 마한문화연구원, 2017, 『여수 석보 3차 발굴조사 –1지구-』.
                              5) 대한문화재연구원, 2017, 『여수 석보 –3차 발굴조사(2지구)-』.
                              6) 문화재청 GIS통합인트라넷시스템